1960년대의 가장 유명한 여배우 중 한 명은 오드리 헵번이다. 그녀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손꼽히면서도 스크린에서는 어마어마한 재능을 분출하던 인물이었다.
오드리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린시절은 상당한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부모인 조지프 빅터 앤서니 루스톤과 엘라 반 힘스트라 남작부인은 네덜란드의 귀족이었으나 그녀가 6살 무렵 그녀의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는 바람에 그녀의 가족은 파멸에 빠지고 말았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오드리 헵번은 네덜란드의 아른험으로 이사했으며, 이 기간 동안의 경험이 훗날 오드리 헵번으로 하여금 유니셰프 활동을 지속하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불우한 어린시절에도 불구하고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런던으로 이사했으나 그녀의 키와 건강 문제로 인해 좋은 배역을 따내는 것이 어려웠다. 발레 대신 그녀는 연기로 전향했고 그녀는 영국의 작은 영화사에서 조그만 배역을 맡으며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드리 헵번은 1951년 브로드웨이 연극 'Gigi'의 여주인공이 되는데 이 연극을 통해 그녀는 히트를 쳤고, 토니상 연극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 여주인공을 맡았는데 기자와 함께 로마를 탐험하기 위해 왕실의 의무를 피하는 공주 역할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10년 동안 오드리 헵번은 '사브리나', '수녀님의 이야기',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등의 영화를 찍으면서 성공가도를 달렸고, 그녀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그 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배우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오드리 헵번은 1954년 배우 멜 페러와 결혼하여 아들 션을 낳았는데 이후 1968년 둘은 이혼을 했고, 오드리 헵번은 이혼 이후 로버트 윌더스나 안드레아 도티 등과 연애를 지속해 나갔다.
그녀의 사생활은 어떨지 몰라도 오드리 헵번은 인도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오드리 헵번은 유니셰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어린이들의 실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녀의 어린시절에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훗날 유니셰프를 통해 어린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을 쏟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은 빈혈이나 호흡기, 위암 등 여러 질병을 계속 달고 살았고 1988년, 오드리 헵번은 희귀암을 진단받기에 이른다. 이후 그녀는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을 받았으나 오드리 헵번의 건강은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1993년 63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오드리 헵번은 영화배우로서도 그리고 인도주의자로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남긴 작품들을 통해 그녀의 연기와 아름다움을 남긴 것은 물론 어린이들의 권리를 위해 지속했던 그녀의 활동은 두고두고 귀감이 될 것이다.